2003년 덴마크 빌룬에 위치한 레고 본사는 침묵에 잠겨 있었습니다. 창립 이래 처음으로 약 8억 달러에 달하는 손실을 기록했고 회사는 파산 직전까지 몰렸기 때문이죠. 언론은 플라스틱 블록의 시대는 끝났다고 말했고 70년이 넘는 가족 기업의 역사는 이렇게 끝나는 듯 보였습니다.
더 아이러니한 사실은 레고가 실패한 기업이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너무 많은 성공을 거뒀고 너무 많은 기회를 잡으려 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혁신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모든 것에 예스라고 답한 대가로 위기를 맞은 기업의 기록입니다. 그리고 어떻게 레고가 아니오라고 말하는 법을 배우며 다시 정상에 올랐는지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위기는 느리게 시작됐다
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 레고는 장난감 업계의 절대 강자였습니다. 전 세계 아이들은 레고 블록으로 놀았고 브랜드는 창의력의 상징이었습니다. 하지만 1990년대 후반 분위기는 서서히 바뀌기 시작합니다.
비디오 게임과 디지털 엔터테인먼트가 등장하며 아이들의 놀이 방식이 변했습니다. 매출은 정체됐고 경영진은 위기감을 느꼈습니다. 그들이 선택한 해법은 더 많은 것을 하자였습니다. 레고는 이 시점부터 확장이라는 이름의 실험을 시작합니다.
모든 것에 예스라고 말한 대가
레고의 확장은 전방위적이었습니다. 테마파크 레고랜드를 인수했고 의류 라인을 출시했으며 비디오 게임과 TV 시리즈 제작에도 뛰어들었습니다. 장난감 회사가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영역에 손을 댔습니다.
제품 라인도 폭발적으로 늘어났습니다. 1990년대 초 약 6,000개였던 부품 종류는 2004년 12,000개를 넘어섰습니다. 아이들이 단순한 블록에 싫증을 낼 것이라는 판단 아래 레고는 점점 더 복잡하고 특수한 부품을 만들었습니다. 로봇 시리즈와 액션 피규어는 기술적으로는 인상적이었지만 기존 레고의 조립 철학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결과는 참담했습니다. 생산 비용은 급증했고 재고는 쌓였으며 유통망은 혼란에 빠졌습니다. 무엇보다 치명적인 것은 정체성의 붕괴였습니다. 레고가 무엇을 하는 회사인지 누구를 위한 회사인지 명확히 설명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외부에서 온 CEO의 불편한 질문
2004년 레고는 역사상 처음으로 비가족 출신 CEO를 영입합니다. 맥킨지 출신의 요르겐 비 크누스토르프였습니다. 그는 레고에 대한 감정적 애착이 없었죠. 바로 이 점이 필요했습니다.
그가 처음 한 일은 회사 전체를 해부하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사업 부문과 제품 라인을 분석했고 그 결과는 충격적이었습니다. 12,000개가 넘는 부품 중 실제로 수익을 내는 것은 극히 일부에 불과했습니다. 대부분의 제품은 팔릴수록 손해를 키우고 있었습니다.
크누스토르프는 경영진에게 불편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레고의 핵심은 무엇인가?' 레고의 정체성은 플라스틱 블록을 통한 창의적 조립 놀이였죠. 문제는 회사가 이 답에서 너무 멀리 와 있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아니오라고 말하는 시스템을 만들다
크누스토르프의 전략은 선택과 집중으로 요약됩니다. 가장 먼저 비핵심 사업을 정리했습니다. 레고랜드를 매각했고 의류 사업을 중단했으며 비디오 게임 개발 조직을 축소했습니다. 심지어 레고 본사가 위치한 빌룬의 부동산까지 매각해 현금을 확보했습니다.
제품 라인 역시 대대적으로 정리했습니다. 부품 종류를 절반 이하로 줄였고 판매 부진 제품은 과감히 단종했습니다. 특수 부품 개발을 멈추고 기본 블록의 호환성을 강화했습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변화는 기준이었습니다. 그는 모든 신제품 기획에 세 가지 질문을 의무화했습니다.
Q. 이것이 레고의 조립 경험을 강화하는가?
Q. 기존 블록 시스템을 활용할 수 있는가?
Q. 수익성이 명확한가?
이 중 하나라도 아니오라면 프로젝트는 중단됐습니다.
이 과정에서 내부 반발도 컸습니다. 혁신을 막는다는 비판이 나왔습니다. 하지만 크누스토르프는 단호했습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할 수 없다. 잘하는 것에 집중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핵심으로 돌아가자 그리고 다시 관찰하자
구조조정과 함께 레고는 고객을 다시 보기 시작했습니다. 아이들을 직접 관찰하고 인터뷰하면서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아이들은 여전히 만들기를 좋아하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아이들이 아니라 레고가 만든 복잡함이었습니다.
레고는 제품 개발 방식을 바꿨습니다. 정교한 완성품을 만드는 대신 기본 블록의 조합으로 다양한 상상이 가능하도록 설계했습니다. 레고 시티 시리즈는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각각의 세트는 독립적이지만 모든 부품이 서로 호환돼 아이들이 자유롭게 재구성할 수 있었습니다.
동시에 레고는 성인 팬들의 존재를 재발견합니다. AFOL이라 불리는 성인 애호가 커뮤니티와 적극적으로 소통하며 그들의 아이디어를 제품화하는 플랫폼을 만들었습니다. 팬들의 열정은 가장 강력한 마케팅이 됐습니다.
선택적 확장 그리고 주도권 유지
집중한다고 해서 외부와의 협업을 멈춘 것은 아니었습니다. 레고는 스타워즈, 해리포터, 마블 같은 인기 IP와 전략적 파트너십을 맺습니다. 하지만 이전과 달랐던 점은 주도권이 레고에게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IP를 활용하되 놀이 방식은 레고의 조립 철학을 따르도록 했습니다. 캐릭터는 빌려왔지만 시스템은 레고의 것이었습니다. 이는 확장이 아니라 핵심을 강화하는 방식의 진화였습니다.
기적은 선택의 결과였다
결과는 극적이었습니다. 2005년부터 레고는 흑자로 돌아섰고 이후 10년간 두 자릿수 성장을 이어갔습니다. 2014년 레고는 매출과 브랜드 가치에서 세계 최대 장난감 회사로 올라섰습니다.
파산 직전이었던 회사가 글로벌 1위가 되기까지 걸린 시간은 약 15년. 그 사이 레고는 단 하나의 교훈을 몸으로 증명했습니다. 성장보다 중요한 것은 정체성이며 혁신보다 어려운 것은 거절이라는 사실입니다.
레고가 남긴 질문
레고의 위기는 확장의 유혹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보여줍니다. 특히 자원이 한정된 기업일수록 모든 기회에 반응하는 순간 무너질 수 있습니다.
레고가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이유는 단순합니다. 잘하는 것을 다시 정의했고 '아니요'라고 말하는 기준을 만들었으며 그 기준을 끝까지 지켰습니다.
지금 나의 조직은 어떤가요? 너무 많은 것을 하고 있지는 않나요? 성장이라는 이름으로 정체성을 희생하고 있지는 않나요? 지금, 무엇에 아니오라고 말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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